성에우세비오 경당(Cripta di San Eusebio)

 

성가이오 경당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정사각형이지만 너무 크지는 않다. 이곳 사방벽과 바닥은 대리석으로 덮여 있었다. 채광창은 근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의 채광창은 갱도 천정에 나 있었다. 이 경당에는 아치형 묘소가 셋 있다.

 

오른편 벽에 나 있는 아치형 묘소가 성에우세비오의 무덤이었다.

무덤 내부는 대리석으로 덮여 있었고 아치는 모자익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근대에 와서 복원된 비문에는 성에우세비오를 기려 다마소 교황이 작사한 송가가 새겨져 있다.

묘실 한가운데에는 원래의 송덕비를 본뜬 조악한 복사품이 놓여 있다. 고트족의 침략과 약탈이 있고나서 교황 비르질리오(Virgilius: 537-559)가 다시 만들어 세우게 한 것이다. 비석 뒷편에는 카라칼라 황제를 기리는 헌정문이 실려 있다.

다마소 교황의 송가는 에우세비오 교황이 그리스도교를 저버린 배반자들, 곧 박해가 두려워 신앙을 부정했으므로 "타락자"(lapsi)로 불리우던 자들에게 보인 선의와 자비로운 처사를 기념하는 내용이다. 에우세비오 교황의 처사에 반대하던 주장은 당대 로마 성직계를 대표하던 헤라클리오(Heraclius)의 입장으로 배교한 후에도 참회하고 돌아오는 신도들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교황은 늘상 용 서하던 그리스도의 모범을 거론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해하고 도량있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고, 배교자들도 일정한 시기 동안 적정한 보속을 한 다음에는 용서받고 교회에 받아들여져야 마땅 하다고 결론내렸다.

이 문제는 성코르넬리오 교황(Cornelius: 251-253) 치하에서도 논란이 되었던 것으로 서기 3세기말과 4세기초 그리스도교 내부에 커다란 대립을 초래했었다. 사회 질서의 교란까지 야기되었다. 황제 막센시우스는 둘로 갈라진 종파들 사이의 대립 때문에 양파의 우두머리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조처를 취해야만 했다.

교황 에우세비오는 시칠리아로 귀양가서 얼마 뒤 강제노동으로 탈진해 죽었다. 교회는 즉각 그를 순교자로 대우하였다. 그의 후계자 성밀티아데스는 그의 유해를 로마로 호송하게 한 다음 이곳 경당에 묻었고 그래서 이 경당에는 그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송가는 <다마소 주교가 순교자 주교 에우세비오에게 바친다>는 헌사로 시작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헤라클리오는 타락자들이 자기 죄를 참회할 여지도 주지 않았거니와
에우세비오는 이 가련한 종낙들도 자기 죄를 참회해야 한다고 가르쳤더니라.
백성은 받은 바 수난을 강조하려다 보니 두 파당으로 갈라지고 말았고
그리하여 언쟁과 불화, 소요와 무력충돌이 터졌더니라.

[에우세비오와 헤라클리오는] 둘다 잔학한 폭군에게서 유배를 당했으니
지도자는 평화의 원칙을 순수하게 고수한 까닭에
유배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였더라, 하느님의 심판을 기다리며.
그렇게 시칠리아 바닷가에서 세상을 버리고 현세 목숨을 마감하였다.